아무튼, 정리
🔖 이제는 일과 틈틈이 시간을 쥐어짜 효율성을 곱절로 올리려던 나 자신이 딴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때의 나와 멀어졌다. 그 기준에 따르자면 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지 꽤 됐다. 더 이상 외국어 공부도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에도, 주말에도 짬을 내어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대개 그냥 통으로 쉬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조금 관대해졌다.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자책하거나 더 시간을 쪼개 쓰는 방법을 찾는 대신 조용히 되뇐다, 나는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나는 아침에 일어났고, 아이들을 깨웠고, 밥을 했고, 도시락을 쌌고,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는 호러 팟캐스트를 들었다. (…) 5분, 10분을 여기저기서 효율적으로 잘라내 완벽한 10에 가까이 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니다. 무언가 하기 위해 떼어내는 5분은 공짜가 아니다. 내 의지력에서 깎아 가져오는 일이다. 그 5분으로 인해 나는 저녁에 조금 더 피곤할 것이고, 아이들을 향한 인내심도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점심을 먹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요가 매트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것이다. 책상에 쌓인 서류는 나중에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리하겠다.
🔖 나의 작은 세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한번 흐른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고 살아야 한다. 주변인들의 시선 역시 내가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노력으로 어찌어찌 메꾼다 해도, 노력할 수 있는 역량조차 내가 타고난 것에 크게 좌우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이 삶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공간뿐. 어질러진 것들을 줍고 한곳에 담아 빈 공간을 약간 넓히고,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고 모으고 정리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질서를 찾아야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내 공간을 방치하는 것 역시도 선택이다. 내 마음대로 흩트리고 부수고 망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고 몇 년 정도 지난다면 청소를 하든 별 상관 없어지는 상태가 될 것이다. 우주 안의 모든 것들이 무질서로 향한다.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나는 점점 그것에 쓸려 간다. '내 마음대로' 방치한다고 믿고 '내 의지대로' 망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저 자연적 엔트로피에 쓸려갈 뿐이다. 망치를 들고 때려부수는 것보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책들이라도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엔트로피에 반항적이다.
우주 전체로 따지자면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육체 하나에 깃들어 있는 나와 그런 내가 살아가는 공간은 크게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나까지 스스로 의미가 없다고 동조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있으니 이 육체가 의미가 있고,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닿아야 하는 공간이므 로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그런 공간을 지배하고 엔트로피에 대항해 싸우는 방법은... 책상 정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 노년은 날이 저물수록 불타고 포효해야 하니, /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 지혜로운 자들은 마지막엔 어둠이 당연함을 알게 되어도, / 자기만의 언어로 번개 한번 못 찍어봤기에 /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아요. // (...) 꺼져가는 빛에 맞서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 딜런 토머스, 「저 좋은 밤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어차피 우리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삶에서 고작 책상 하나 정리하는 일이란 아무 의미 없는 파닥거림으로 폄하될지 몰라도 나라는 개체가 있는 시공간에서 정리는 절대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무질서로 내달리는 세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내 작은 공간은 내가 사수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잊혀짐에 대항해 싸운다. 얌전히 가진 말자.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자. 반항하자. 엔트로피에 쓸려가지 않기 위하여.